'1871 영해동학혁명' 153주년을 맞아 희생자와 역사적 의의를 기리는 추모제와 기념비 제막식이 경북 영덕군 현지에서 29일 열렸다.
이날 행사는 오후 1시 30분 영해면사무소 공원에서 1871영해동학혁명기념사업회(위원장 권대천)가 영덕군의 후원으로 주최해 전남 무안과 충남 천안, 경북 예천·포항·영양·상주 등 전국의 동학단체 관계자와 유족 대표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또 김광열 영덕군수, 손덕수 영덕군의회 의장, 박형수 국회의원, 황재철 경북도의원, 정갑선 천도교 교무관장, 고재국 전국동학농민혁명연대 대표, 이석태 (사)동대해문화연구소 이사장 등이 행사를 축하했다.
제막식에서 철학자 도올 김용옥은 자신이 쓴 비문 설명을 통해 "1871년 영해에서 일어난 수운 최제우 교조신원운동은 동학혁명의 시원이다"며 "왕정에서 민주로 인류사의 축을 바꾸고 역사의 구조를 바꾼 진정한 혁명"이라고 평가했다.
1871년 영해동학혁명은 조선말 대원군의 철권정치와 동학 탄압 정책에 항거해 영해를 비롯한 동해안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혁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동학2대 교조 최시형과 이필제가 주도한 당시 봉기로 100여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많은 교도들이 옥고를 치렀다. 올해 행사는 교조인 수운 최제우 탄신 200주년의 해를 맞아 역사적 의의를 더하고 있다.
한편 이번에 제막된 영해동학혁명 기념비는 영덕군이 주민 참여예산 제안 공모로 선정, 건립됐다.
다음은 영해동학혁명 기념비의 전문이다.
1871 영해! 동학혁명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혁명은 전율이다! 혁명은 한 시각의 생멸의 사건이 아니라 역사의 구조를 바꾸는 긴 과정이다. 이 과정은 단순히 정치권력의 뒤바꿈뿐만 아니라 민 다수의 삶의 가치가 조화로운 창조적 전진을 해야 한다. 근대혁명의 대표적 사건으로서 18세기말 프랑스혁명을 들지만, 19세기 중엽에 조선 대륙에서 흥기한 동학혁명사상은 프랑스의 인권선언보다도 훨씬 더 근원적인 범인류적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서양은 신 앞의 인간의 평등을 말하지만, 동학은 하느님과 인간의 평등, 그 양자가 협동하는 역사를 말한다. 이 인내천의 사상은 경 주 용담에서 태어났지만, 수운의 철학을 사회화시키고 조직적 운동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영해·영덕 지역의 사람들이었다. 수운은 고향 경주에서는 영남 유생들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영해는 경주에 인접해 있는, 동해안의 유니크한 대평원지대로서 농수산자원이 풍부하고 교양 수준이 높았다. 신·구향의 대립으로 개화된 신향의 사람들은 반상서의 차별을 철폐하는 동학사상을 충심으로 수용하고 그 운동을 신향의 기치로 내걸으며 동학운동의 하부구조를 구축하였다. 그 중심인물이 훗날 수운의 일대기를 집필한 영해 인천리의 박하선 접주였다.
수운이 처형된 후 도통을 전수받은 해월은 고비원주의 피신 생활을 계속했지만 결국 보호막이 탄탄한 이 지역 일월산에서 "다시 개벽"의 비밀 아지트를 마련한다.
이필제는 조선왕조를 뒤엎는 정치혁명이 없이는 동학도, 이 민족의 미래도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전문 혁명가였다. 그는 교조신원"과 "광제창생의 명분을 내걸고 영해로 와서 해월을 만난다.
필제의 끈질긴 설득 끝에 해월은 이필제의 주장에 대다수의 동학도인들이 찬동하는 것을 보고 기포를 명한다. 불과 나흘 만에 의관을 정제한 육백 명의 도유들이 모인다. 1871년 3월 10일 인간 평등의 깃발을 든 민중들은 정확한 판결문을 포고하고 탐학을 일삼는 영해부사를 처단한다.
이 사건으로 100여 명의 선비들이 목숨을 잃어 동학운동이 좌절되는 듯이 보였지만 오히려 동학은 정치화되고 사회화되고 조직화되어 해월의 피신행각을 위대한 거국적 혁명의 행진으로 만들었다. 이필제는 문경에서 재차 기의하여 같은 해 12월 24일 서울에서 처형됨으로써 해월지도부에게 의리를 지키고 혁명가다움게 생애를 마감하였다. 영해의 신미동학혁명이야말로 조선민중 혁명정신의 근원이며 시발이다. 명하여 말한다.
저작권자 ⓒ 뉴스포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