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신광이 고향인 동학 2대 교조 해월 최시형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하는 강연회가 포항에서 열렸다.
포항지역을 대표하는 학술단체인 (사)동대해문화연구소는 지난 21일 포항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 ‘해월 최시형 평전’의 작가인 성주현 청암대 교수를 초청해 ‘해월 최시형 대한민국을 깨우다’ 주제의 강연회를 개최했다.
경상북도와 포항시, 포항시의회가 후원한 이날 행사는 해월 선생의 고향인 신광면 등 포항 시민과 경북지역 동학 관련 단체 관계자 등 150여 명이 참석한 열띤 분위기 속에서 당초 예정된 시간에 1시간을 더해 3시간 동안 진행됐다.
성주현 교수는 상세한 시각자료와 함께 해월의 탄생부터 조실부모하고 불우했던 어린 시절, 당시 풍습으로 외가인 경주 황오동에서 태어나 17세에 부친의 고향인 신광 기일리에 온 과정, 흥해 매산리 손씨와의 혼인과 동학 입도 과정을 에피소드를 곁들여 상세하게 설명했다.
성 교수는 이후 해월이 수운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동학의 2대 교주가 되고 수운의 순도 후 36년간을 수배자로 숨어 다니면서 동학을 전국에 포교하고 1871영해동학혁명과 1894동학농민혁명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위상에 대해 강조했다.
특히 성 교수는 그동안 동학혁명사에서 주로 알려져온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은 접주의 신분으로서 교조인 해월의 승인 없이는 봉기가 이뤄질 수 없는 구조였음을 부각시켰다. 따라서 해월이 3대 교조이자 처남인 의암 손병희를 통령으로 임명하는 등 동학혁명 전체를 관장한 지도자로서의 위상이 재정립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봉건시대를 산 해월 사상의 근대성과 민족운동사에서의 위치에 대한 성 교수의 강의도 관심을 모았다.
성 교수는 △적서·남녀·귀천 차별 등 신분 철폐 △만민평등과 삼경사상(경천, 경인, 경물)은 물론 '어린이를 때리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은 소파 방정환의 어린이 운동 등 해월의 사상은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보편성을 가진 가르침으로 계승·발전·공유할 가치라고 제시했다.
민족운동사에서도 해월 최시형은 봉건 왕조사회에서 근세 사회를 거쳐 시민사회로 나아가는 기반을 닦고, 제자들은 국권 침탈 후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독립운동에 투신해 광복에 이르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사상은 민초들을 각성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성주현 교수는 동대해연이 추진 중인 해월기념관 건립 사업의 의의에 대해서도 특별히 강조했다.
성 교수는 "역사 속에 우뚝 선 포항사람 해월 최시형 선생의 기념관은 아직까지 전국 어디에도 없다"면서 "그의 고향인 포항에 경상도 지방의 동학과 전라도 지방의 혁명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기념관과 교육관이 건립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강연에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해월 선생의 가족과 독립운동 투신 및 순국, 동요 '짝짜꿍' '졸업식노래'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로서 납북된 정순철이 외손자라는 사실도 관심을 모았다.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난 일화로도 유명한 장남 최동희는 고려혁명당을 조직한 천도교 독립운동가로서 상해에서 37세로, 차남 최동호는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24세에 삶을 마쳤다. 두 사람에게는 각각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애국장이 추서됐다.
'천도교 동학의 딸''용담할매'로 불리워진 딸 최윤은 1894년 동학혁명 와중에서 충북 옥천의 관아에 갇힌 뒤 현감이 '데려가 살라'며 청지기에게 내맡겨 정순철을 낳았다. 그는 손병희의 도움으로 보성고교를 졸업하고 방정환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해 어린이운동을 했다. 일본 유학 후 무학여고 음악교사로서 작곡활동을 하던 중 한국전쟁 때 납북된 후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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