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세상을 떠난 연극배우 윤석화씨가 오늘 영면에 든다. 가수 조영남이 방송에서 그랬던가, '윤돌꽃'이라고. 그녀는 공연제작사인 '돌꽃컴퍼니'의 대표이기도 했다. 돌 위에 핀 꽃처럼 당당하게 살다가 일흔을 열흘쯤 남기고 삶 저 너머의 또 다른 돌에 뿌리 내리려는 듯 이생을 버렸다. '폐병'(결핵)이 예술가들의 병이라고 들은 적이 있는데 그녀는 뇌종양을 앓으면서 앞니가 너댓개 빠져 있는 모습을 카메라 앞에서 굳이 숨기지 않았다. '아이와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다'는 이유로 항암치료도 거부했다니 참으로 배우답게 생을 마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재 현장에서나, 공연장에서 그녀를 만난 적은 없다. 하지만 오래 잊고 지냈던 윤석화 배우의 부음 소식에 한 예술인과 연극, 문화예술이 사람들의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까지 생각이 이어졌다. 80년대 중후반에 다닌 대학은 극단들의 소공연장이 모인 동숭동 근처였다. 대학가에 화염병과 최루탄이 일상이었던 시절이었지만 등하교를 위해 늘 지나치던 대학로의 경험은 문화예술에 대한 나름의 애정이 꽃핀 한 계기가 됐다. 대학 학보사에 자주 우송되던 연극초대권을 들고 가장 빨리 공연장에 갈 수 있는 은밀한 즐거움도 누렸으니까. 하숙집에서 방 창문을 열면 담너머로 거의 맞닿은 옆집에는 나중에 국회의원을 했다가 '설화'(舌禍)로 낙마했던 배우 최종원씨 가족이 세들어 있었다. 가끔 한밤중에 절친인 전무송 배우가 찾아와 통음하는 '소음'들이 들려오기도 했다.
윤석화가 이름을 알린 계기는 1983년 연극 '신의 아그네스'였다. 그녀의 사망을 보도하는 언론들은 '1세대 스타 연극인' 또는 '1세대 연극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지만 전자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국내 1세대 연극인이라면 서울역 뒤 빨간 색깔의 예술공간에 이름을 빌려준 고 장민호·백성희 선생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 다음을 따지자면 쟁쟁한 무대 전문 배우들이 있었지만 대중적인 지명도로는 최근 타계한 고 이순재 선생과 손숙 배우가 있으며 윤석화는 3세대 급에 속한다. 분명한 점은 그녀는 연극인이 대중적 스타가 된 선두주자였으니 '1세대 스타 연극인'은 옳은 판단이다. 돌이켜보면 TV 출연이 아닌 연극 공연만으로 윤석화를 스타로 만든 배경에는 한국 사회의 시대상이 반영돼 있었다.
정부가 80년대 중반 무렵 동숭동 대학로를 문화예술의 거리로 정비하기 시작한 즈음에 윤석화가 열연한 '신의 아그네스'는 대성공을 거뒀다. 1983년은 전두환 정권이 '12·12'와 '광주'의 폭압적 이미지를 소위 '유화 국면'으로 전환하기 위해 겉으로는 '알고 보면 부드러운 대통령'이란 식으로 덧씌우고 있던 시기였다. 대학로에는 소공연장 지원 정책을 통해 연극 공연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런 틈을 뚫고 김명곤을 비롯한 민중예술가들은 검열과 사찰의 사선을 오가며 저항의 공연을 이어갔다. 물론 정보형사들에게 공연의 '불온성'이 감지되면 건물주에 대한 압력을 통해 공연장 대관은 거부됐다. 그렇다면 윤석화의 '신의 아그네스'는 무엇이었을까.
이 작품은 수녀원에서 아이를 낳은 성직자가 (자신은)'육욕에 의한 성적 접촉이 아니라 신의 영성과 은총에 의해 수태했다'며 교회와 법, 의학의 권위 앞에 맞서는 내용이다. 1979년 미국에서 발표됐을 당시에도 문제작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정권의 입장에서는 '한국도 이제 미국 브로드웨이의 선진 문화를 수입해 배우와 관객이 소화할 수 있다'는 명분용으로 충분했다. 소위 '허용된 문제작'. 그런데 이 공연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경험케하는 지점도 참으로 절묘했다. 함부로 진실을 말 할 수 없는 시대에 관객들은 가녀린 수녀 아그네스가 교회의 신성, 법과 의학의 이성 앞에서 당당히 자신을 주장하는 모습에 억눌린 감정이 발산했다. 그래서 "'신의 아그네스'의 흥행은 민주화 이전 한국 사회가 허용한 가장 정교한 정치적 발언 중 하나였다"는 평론이 나왔다. 그리고 윤석화라는 '스타'가 탄생했다.
'이대 나온 여자'라고 학력을 포장했다가 한동안 수모를 당한 적은 있지만 윤석화는 늘 당당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1987년 이후 민주화의 봇물이 터지면서 '지구상의 마지막 식민지'라고 했던 여성 인권이 제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데 윤석화는 앞장서서 그 무겁게 닫힌 문을 열어제치는 듯 했다. 가끔 TV에 출연한 모습에서 '지적인 서울여자가 다소 과장스럽게 얘기한다'는 거부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녀는 오래 알아온 우리 시대의 스타였다. 운명은 일흔의 문턱에서 한 배우를 데려갔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대한민국이 거둔 산업화와 민주화 성취의 변곡점에서 윤석화를 통해 'K-컬쳐'의 오늘을 예고했다는 점에서 운명이란 역시 한편 무대의 연출가 같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연극배우 윤석화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연기를 하듯 객석에 이런 추억과 영감 하나를 안겨주고 무대를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