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장동혁 후보 선거사무소 개소식에 한동훈 당 대표가 참석한 모습.
자유민주주의 핵심 가치는 다수의 뜻을 따르되 소수의 권리와 의견도 존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지만, 작금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철저히 다수의 의견을 중시하고 있다. 특히 선거 당시 지지했던 유권자를 중심으로 정책을 펴나가는 것이 한국이나 미국에서 대세가 되고 있다. 정당은 선거에서 승리해서 집권하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세우고 유권자의 표심을 얻기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정책을 수립한다. 여기에 더해 팬덤을 가진 정치 리더들이 비록 걸어온 노선과 추구하는 목표가 상이할지라도, 궁극적인 목표인 선거 승리라는 명제 앞에서는 '오월동주'(吳越同舟)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기도 했다.
기원전 5세기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오나라의 합려가 월나라를 침공했다가 역공을 당해 월나라를 이끈 구천에게 패하고, 이 전쟁에서 발생한 상처로 인해 오나라의 합려가 죽게 된다. 오왕 합려는 임종하면서 그의 아들 부차에게 월나라의 왕 구천을 죽여 복수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 이에 합려의 아들인 부차는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는 와신(臥薪)을 행하며 힘을 길러 월나라를 정벌하고 회계산에서 구천에게 항복을 받는다. 이에 구천은 부차의 몸종 노릇을 자처하며 부차의 변도 먹어가며, 온갖 진귀한 뇌물을 갖다 바쳐 충성을 다한 끝에 부차의 눈을 멀게 하여 월나라로 돌아온다.
월나라로 돌아온 그는 천하의 경국지색인 서시를 바쳐 부차를 쾌락에 빠지게 만들고 아침저녁으로 곰의 쓸개를 핥는 상담(嘗膽)’으로 힘을 길러 오나라를 정복하는 복수를 행했다. 이 기간동안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들은 철천지 원수지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손자병법의 창시자인 손자는 “오나라와 월나라는 원수처럼 미워하는 사이지만, 그들이 한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났다고 하면 원수처럼 맞붙어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양쪽 어깨에 붙은 오른손과 왼손의 관계처럼 도울 것”이라며 '오월동주'(吳越同舟)를 전략으로 내세우며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는 비록 적일지라도 힘을 합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 우리의 정치 현실은 민주당이 지난 총선에서 압승하며 입법부인 국회를 장악했고, 탄핵으로 촉발된 대통령 선거에서도 민주당이 승리하여 행정부까지 장악했다. 입법부와 행정부를 장악한 민주당은 사법부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사법부마저 장악하기 위해 선출 권력이 임명 권력 위에 있다며 안하무인의 행태를 서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제1야당인 국민의힘은 집권당의 프리미엄으로 치러진 지난 총선에서 내분으로 입법부를 내주고, 권력으로 소꿉놀이를 벌이다가 탄해 국면에서 치러진 대선마저 심야의 ‘후보 바꿔치기’ 쿠데타를 일으키며 적전 분열로 정권을 헌납하고 말았다. 대선 패배 이후 당을 추스르기 위한 전당대회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을 놓고 찬탄파와 반탄파의 볼썽사나운 꼴불견으로 국민의 외면을 받았다.
그 중심에는 한때 국민의힘 총선 승리라는 대명제 앞에 앞서거니 따르거니 했던 두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이후 비상계엄으로 촉발된 탄핵 국면부터 입장 차를 드러내며 견원지간이 된 한동훈 전 대표와 장동혁 현 대표다. 이들은 지난 국민의힘 전당대회 기간 최고조의 긴장감을 보이며 적대적 관계가 되었다. 당 대표에 출마한 장동혁 의원에 대해 한동훈 전 대표가 최악이라는 평을 내리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모습이었고, 장동혁 대표가 취임하며 한동훈 전 대표를 비롯한 친 한계에 대한 출당론이 나올 만큼 당내 분위기는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장동혁 대표와 한동훈 전 대표가 12·3 비상계엄으로 촉발된 적대적 관계로 서로를 정립하기엔 두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이 너무 멀다. 장 대표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해야만 하고, 임기 2년의 당 대표직을 무난히 수행해야만 정치적인 미래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민주당을 외치기 이전에 국민의힘 내부를 결속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또 정치적으로 가장 큰 팬덤을 가지고 있고 당내 일정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한 전 대표를 안고 가야 한다.
한 전 대표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민을 우선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저지하며 탄핵을 지지했다. 하지만 탄핵 트라우마가 있는 국민의힘 당원들이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을 불식시키고 차기 대권주자로 한 걸음 더 나가기 고군분투 중이다. 이를 위해서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일정 부분의 역할을 하여 당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런 두 사람이 구원(舊怨)을 버리고 힘을 합칠 명분은 지방선거 승리 하나로 충분하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오월동주의 사례는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김대중과 김종필의 DJP 연합이다. 1997년 대한민국은 정치·경제적 위기가 겹친 우울한 시기였다. 외환위기의 쓰나미가 밀려와서 사회적 불만이 팽배한 가운데 여당은 이회창과 이인제 후보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때 정치적 경쟁자이자 적대 관계에 있어 절대 합쳐질 수 없다고 본 정치권의 두 거목 김대중(DJ)과 김종필(JP)이 대통령 선거 승리를 위해 전략적 연합을 결성한다.
DJ는 오랜 민주화 투쟁과 야권 지도자로서의 지지 기반은 있었지만, 안정적인 정치 세력의 확보가 필요한 상태였다. 김종필은 과거 군사 독재 정권과 연관되어 확장력이 부족했지만, 보수층과 충청권이라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조직력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정치적 배경과 이념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선거 승리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손을 맞잡았다. DJP연합의 핵심 전략은 서로의 장점을 결합하는 것이었다. DJ는 야권과 개혁 세력을 대표하며 국민적 지지를 모았고, JP는 조직적 기반과 지역 표를 결집했다. 두 세력의 결합은 결국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반(反)여권 연대’라는 효과를 낳았고, 국민들은 변화와 안정, 두 가지 요구를 동시에 충족하는 후보로 김대중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DJP 연합은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며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이 사례는 정치적 적대자가 오월동주하여 단기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교훈을 보여준다. DJP 연합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이질적 동맹이 승리할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남겼다. 정치란 이상과 현실이 공존해야 한다. 이상적인 정치 성향으로 국민을 우선하는 정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한동훈 전 대표와 현실을 냉정히 파악해서 현장 정치를 추구하는 장동혁 대표가 내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정권의 무능과 무질서를 견제하고 지방 권력 확보라는 공동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가 가진 강점을 무기로 힘을 합쳐야 한다.
장동혁이 가진 역동적인 정치력과 청량감, 한동훈이 가진 명석함과 국민을 우선하는 법치를 바탕으로 한 확장력은 서로에게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이 특검 정국과 압도적인 의석수로 일방 독주로 나아가는 현실에서 국민의힘은 과거에 매몰되어 내년 지방선거를 갖다 바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된다. 만약 민주당이 지방 권력까지 장악하게 된다고 가정하면 차기 총선에서 국민의힘은 저잣거리에 떠도는 '영자당'(영남자민련)이라는 조소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현재 민주당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년 지방선거까지 내란 몰이로 몰아가 싹쓸이하겠다고 호언했지만, ‘통일교 게이트’란 거대 암초를 만나 그 수렁이 어디까지 갈지 예측 불허한 상황이다. 국민의힘은 조속히 지리멸렬한 자중지란에서 벗어나 단일대오로 정비하여 국민들이 왜 국민의힘을 지지해야 하는지 그 존재감을 부각시켜야 할 기회를 잡을 적기는 바로 지금이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조조의 위나라에 맞서 앙숙이었던 촉의 유비와 오나라의 손권이 오로지 생존을 위해 힘을 합쳐 ‘적벽대전’이라는 전무후무의 승리를 가져왔다. 장동혁 대표와 한동훈 전 대표는 내년 지방선거 승리라는 대의 앞에서 소의를 버리고 반드시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보수층의 지지를 받는 장동혁과 중도층에 확장력 있는 한동훈이 힘을 합쳐 오직 자기편만 바라보며 선출 독재를 꿈꾸는 듯한 민주당의 독주를 저지하길 기대해 본다. /김건우(정치에디터·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