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정영상 시인 30주기 추모 전집 출간

포항 출신 전교조 해직교사로 시집 3권 남기고 37세 마감
'감꽃과 주현이', 시 255편과 유년 시절 산문 18편 실려
문학평론가 권순긍 세명대 명예교수의 '정영상론'도 수록

뉴스포레 임재현 기자 승인 2023.06.24 12:27 의견 0
고 정영상 시인의 30주기 추모 전집. (사진=도서출판 아시아 제공)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등 시집 세권을 남기고 아까운 나이 37세에 끝내 그리던 교단에 돌아가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 고 정영상 시인의 30주기 추모 문학전집이 발간됐다.

정 시인은 1956년 포항시 대송면에서 자신의 시에 고스란히 담아냈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포항고 시절 동아리 문영문학회에서 활동하며 시와 인연을 맺었다.

공주사범대(현 공주대) 미술과로 진학한 그는 ‘율문학’ 동인으로 활동하고 졸업 후 경북 안동으로 발령 받아 교편을 잡았다. 문단에는 1984년 '삶의 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나왔다. 교단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한 뒤 1989년 펴낸 첫 시집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그는 전교조 교사들의 대규모 해직사태가 몰아친 그해 8월 안동 복주여중의 교문을 나서야 했다. 교사인 부인이 있던 충북 단양의 자택으로 돌아간 뒤에는 해직교사 연대활동에 참여하면서 작품활동을 하며 두번째 시집 '슬픈 눈'을 펴냈다.

1993년 4월 15일 새벽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한 그는 37세였다. 12월 유고 산문집 '성냥개비에 관한 추억'에 이어 이듬해 1월 유고 시집 '물인 듯 불인 듯 바람인 듯'이 이 생의 빈자리를 채웠다. 2003년 4월 그를 아끼는 이들의 노력으로 ‘정영상 시비’가 공주대 교정에 세워졌다.

정영상 시인의 시와 산문의 바탕에는 이웃과 공유할 것이라고는 가난밖에 없었던 고향 농촌 풍경과 어린 시절이 있다. 시 '두엄'의 전문에는 "이 세상의 열매들을 위한 두엄 같은 삶의 길로 나아갔던 시인"(엮은이 이대환)으로 기억되는 그의 시선이 배여 있다.

'소나 돼지들의 똥과 오줌을/ 쓰라린 속으로 받아들이며/ 서로 끌어당기며 사는 것들/ 그리하여 쉬지 않고/ 오로지 썩는 일에만 몰두하여/ 겨울에도 뻘뻘 땀 흘리며/ 썩으면 썩을수록 더욱 정신 차려/ 논 밭으로 나가/ 쓰라린 속이 기쁨으로/ 열매 맺힐 때까지 사는 것들'

도시민에게는 이제 하찮은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볏집에게 조차 그의 눈길은 따뜻했다.

'볏짚은 따뜻했다. 형이 입던 교복 바지 떨어진 것이나 아버지가 입던 헌바지를 내복 대신 속에다 하나 더 껴입던 시절이라 아랫도리에 바람이 썰렁하게 지나갔던 우리들의 겨울, 볏짚은 따뜻했다.'(산문 '볏짚'의 첫 부분)

문영문학회 후배로서 거친 청춘을 함께 한 이대환 작가가 볏집을 통해 짚어본 시인의 감성은 또 다른 '정영상론'이기도 하다.

'맵찬 겨울철에는 헐벗은 아이들의 포근한 놀이터가 되고, 쇠죽가마솥 아궁이의 불길이 되고, 가난한 농민 가족의 부지런한 손에서 가마니로 거듭나 귀하디귀한 현찰이 되기도 했던 정영상 시인의 ‘볏짚’을 기억할 만한 젊은이는 바야흐로 대한민국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변화해 있다. 그러나 시인의 기억 속에 동영상처럼 간직돼 있었던 유년시절 그 ‘볏짚의 따뜻함’을 지금 여기의 지구촌 방방곡곡에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추모 전집을 읽어 보지 않아도 시인에 대한 기억과 작품의 추천사는 생전 그가 지녔을 체온을 새삼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33세의 정영상 시인


'글 어느 한 편을 읽어도 한 자 한 자 박아 쓴 장인의 손끝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는 본디 그림이 전공이기도 하지만 이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원고지 위에 글을 가지고 그린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에 빠졌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귓가에서 소곤소곤 들려주는 것 같은 나무와 벌레와 작은 것들에 대한 섬세하고도 따뜻한 얘기들은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신경림 시인, 정영상 유고 산문집의 발문에서)

'그 사람 정영상을 회상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단어들이 필요하면서도 적확한 단어가 없다. 그는 물 같은 사람이고 동시에 불 같은 사람이었다. 가슴속에는 늘 출렁출렁 감정의 물결을 담고 있다가 누가 장난으로 돌팔매질 하나라도 하면 불같이 일어나 사랑하고 미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부인 박원경 교사의 글에서)

'시적 대상에 대한 애정과 섬세한 눈길이 정영상 시의 토대인 것이고, 이는 인상파 화가 모네(1840∼1926)의 사물 관찰력을 예로 들은 것처럼 미술교사로 평생 그림을 그렸던 관찰력에 기인한 바가 크다. 그 섬세한 손끝에서 하찮은 농촌의 사물들이 생명을 얻고 되살아나 새로운 ‘농부가(農夫歌)’로 탄생한 것이다.'(권순긍 문학평론가, '정영상론'에서)

'서른 해 지나서 새로 읽어도 정영상의 작품들은 이 책에 실은 18편의 산문에 잘 나타난 그대로 타고난 순정의 논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유년시절에 체화한 집안이나 이웃 농민의 빈궁 현실에 대한 쓰라린 애절과 직시의 고통, 그리고 교편을 잡은 1980년대의 독재와 억압에 대한 저항의지와 극복의지를 담은 시 255편은 타고난 순정의 논밭에 자라난 곡식들이다. 순정성, 이것이 사람 정영상의 진면모다.'(이대환 소설가, 엮은이 인터뷰에서)

'정영상문학전집: 감꽃과 주현이'에는 시 255편과 희소하고 귀중한 산문 18편이 수록돼 있다. 전집은 독자가 그의 시적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해 유고 산문집 제1부의 유년 이야기들을 맨 앞에 배치했다.

이어진 시편들은 시집 세 권의 순서를 그대로 따랐다. 유고 산문집의 제2부에 모아둔 전우익 선생·신경림 시인·박원경 교사(정영상의 부인)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보낸 정영상의 편지들과 제3부에 모아둔 그의 단상들, 그리고 시집에 붙은 ‘시인의 말’과 ‘발문’은 수록하지 않았다.

문학평론가 권순긍 세명대 명예교수의 '정영상론'으로 책은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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