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리우자와 다케오 교수의 저작 '러시아 역사' 표지
다음은 일본의 러시아사 연구 1세대 학자이자, 일본에서 중세 러시아사 연구를 개척한 인물인 북해도대학 명예교수 쿠리우자와 타케오(栗生澤猛夫) 선생이 자신의 학문적 여정과 러시아에 대한 인식, 그리고 동아시아인에 대한 역사적 성찰을 담아 7일 포항에서 발표한 '뉴스포레 초청 특별 강연'의 원고 전문입니다. / 편집자 주
▲내가 중세 러시아사 연구를 뜻하게 된 이유
나는 지금까지 60년 이상 러시아 연구에 종사해 왔습니다. 러시아에 흥미를 가지게 된 계기는 나의 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나는 1963년에 일치(一橋)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처음에는 경제학을 전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교양과정(1~2학년)에서 두 개의 외국어를 반드시 선택해야 했는데,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러시아어를 택한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기독교 세례를 받았던 관계로, 유럽(또는 미국)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동북지방 소도시(이와테현 모리오카시)에서 태어난 나에게 유럽이나 미국은 너무나 ‘먼 선진세계’였습니다.
그에 비해, 같은 기독교 국가이지만 어딘가 동양적 요소를 지닌 러시아(유라시아’)가 왠지 더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나는 러시아 문학의 세계에 강하게 끌렸습니다. 경제학 공부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원래 세계사 공부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러시아사 연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러시아사를 연구하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러시아 혁명사나 현대사(소비에트사)를 주제로 삼았지만, 나는 15~16세기 모스크바 시대의 기독교 사상을 연구 주제로 택했습니다.
왜냐하면, 러시아 혁명이든 소비에트 시대든 그 정신적 기반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 실체를 진정으로 파악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졸업논문 주제는 '모스크바 제3의 로마 이념'이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이 1453년에 멸망한 뒤, 정교회 세계의 유일한 계승 국가가 된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가 되었다는 사상입니다. 이 사상을 처음 주창한 이는 수도사 필로페이(Philotheus)로, 그 본래의 의도는 어디까지나 ‘기독교(정교회)의 재생’을 호소하는 것이었으나, 차츰 정치적으로 해석되면서 “러시아는 일찍부터 세계 지배를 꾀했다”는 식의 평가(대표적으로 아널드 토인비)가 생겨났습니다. 이 논문은 10년 후 활자로 출판되었습니다.
대학원에서는 '요시프 볼로츠키의 정치사상'을 연구했습니다. 요시프 볼로츠키는 수도사였지만, '계몽자(啓蒙者)'라는 대작을 저술하여 15~16세기 모스크바 국가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처음에는 대공(大公)에 비판적이었으나, 후에는 대공의 후원을 받아 국가와 교회의 결합을 주장하며 정교회의 주류파가 되었고, 결국 모스크바 대공(차르) 권력의 이데올로그가 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 국가와 교회가 서유럽과 달리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전통은 이 요시프파 때부터 더욱 강해졌습니다.
이후 나는 북해도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으로 진학했는데, 그때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 유학하여 러시아의 중세 도시와 서유럽의 중세 도시를 비교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에서는 국가의 힘이 지나치게 강하고 사회 측의 견제력이 약한 이유가 도시의 미발달에 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 연구는 몇 편의 논문으로만 끝나고 단행본으로는 내지 못했지만, 시야를 넓히는 데는 꼭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2년 유학을 마친 뒤 나는 오타루상과대학에 자리를 얻어 약 10년간 재직했습니다. 이 시기 주요 연구 주제는 이반 뇌제(이반 4세)였습니다. 그는 러시아 최초로 ‘차르(황제)’로 즉위한 군주로, 러시아의 첫 전제군주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1987년 북해도대학으로 옮기면서, 내 연구 주제는 '유라시아주의'와 '몽골의 러시아 지배'로 확대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주로 러시아와 서유럽의 관계에 주목했으나, 이때부터는 러시아와 아시아(특히 몽골)의 관계를 탐구했습니다.
1997년에는 『가짜 드미트리와 동란기의 러시아』(야마카와출판사)를 출간했습니다. ‘동란기(動乱時代)’란 이반 뇌제 사후(1584년)부터 로마노프 왕조 성립(1613년)까지 약 30년간의 혼란기를 가리킵니다. ‘가짜 드미트리’란 이반 뇌제의 이미 사망한 아들 드미트리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며 즉위한 위조 황제로, 폴란드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를 침공해 모스크바를 거의 1년간 점령했습니다. 외국 세력이 모스크바를 점령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때였습니다.)
그 무렵 저서로는 『비잔티움과 슬라브』(공저, 1998)도 있습니다. 그 중 슬라브사 부분을 내가 집필했습니다. “러시아와 몽골” 연구는 2007년 『타타르의 멍에』(도쿄대출판회)**로 결실을 보았습니다.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가 이끈 서방 원정군(1236~1241)이 러시아를 어떻게 침공했는지, 그리고 1240년경부터 1480년까지 이어진 몽골의 러시아 지배가 어떤 형태로 가능했는지를 분석한 연구입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대공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독일 기사단과 스웨덴군을 물리친 영웅이지만, 몽골에 대해서는 복종 정책을 택했습니다.
고려도 몽골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러시아와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주제라 생각합니다. 나는 고려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에게 배우고 싶습니다. 일본에서도 원나라의 침입(문영·홍안의 역, 1274·1281년)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 후 나는 북해도대학을 정년퇴직했습니다. 나는 일본식으로 말하자면 ‘대기만성형’이라기보다 ‘소기만성형’의 인물입니다. 교육과 행정 업무에서 벗어나자 비로소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수로 재직할 때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감이 커서 연구가 그다지 즐겁지 않았지만, 퇴직 후에는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게 되어 오히려 더 생산적이 되었습니다. 역시 인간에게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돈보다 더.
퇴직 후 나는 『그림으로 보는 러시아의 역사』(2010), 『러시아 원초연대기 읽기』(2015), 『이반 뇌제의 그림연대기집』(2019), 『〈그림연대기집〉이 그린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와 그 시대』(2022), 『키예프 루시 고(考)』(2024)를 출판했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M. 페리의 『스탈린과 이반 뇌제』(2009)도 번역했습니다. 현재는 『이반 뇌제와 쿠르프스키 공의 서간집』을 준비 중이며, 올해 말 혹은 내년 초 출간 예정입니다.
쿠르프스키 공은 이반 뇌제의 폭정에서 도망쳐 폴란드로 망명한 귀족으로, 그곳에서 이반을 맹렬히 비판하는 서간을 쓴 인물입니다. 이상은 자랑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께 러시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한편 나를 소개하기 위한 것이니 너그러이 봐주시기 바랍니다.
▲『키예프 루시 고』(2024)에 대하여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쪽을 오래 연구해왔기에 이 사건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두 민족은 벨라루스인과 함께 동슬라브계 형제 민족으로 여겨져 왔는데, 어째서 이런 사태가 일어났는가, 그 의문이 이 책을 쓰게 된 계기였습니다.
‘키예프 루시’란 9세기부터 13세기 초까지 오늘날의 우크라이나(키예프/키이우)를 중심으로 존재한 국가입니다. 일종의 러시아 고대국가라 할 수 있지만, 이를 “러시아사의 고대”로 볼지, “우크라이나사의 고대”로 볼지는 양국 역사학자 사이에서 의견이 크게 갈립니다. 그 ‘키예프 루시의 유산’이 어느 쪽에 속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우리 일본의 러시아사 연구자들은 서구 연구자들의 입장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러시아사의 기원’으로 간주해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것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책에서 2021년 7월 12일자 푸틴 대통령의 논문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일체성에 대하여〉를 분석했습니다.
그는 그 글에서 “키예프 루시는 러시아의 고대이며, 그 당시 우크라이나인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즉, 이번 침공의 배경에는 그런 역사관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푸틴에게서 보이는 인식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형제지만 형(러시아)에게 순종하는 한 동생(우크라이나)을 존중하되, 거역하면 혼내도 된다”는 태도입니다.
일본인도 과거에 한국인에게 비슷한 사고를 강요한 적이 있음을 떠올리며, 나는 깊이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무엇이든 강요는 옳지 않습니다. 반면 우크라이나 역사학자들의 시각은 서구나 일본 연구자들에게 거의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일부, 지방 정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 역시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들은 오래전부터 자신들의 독자적 정체성과 독립성을 주장해왔고, 1991년 이후 그것은 국제적으로 승인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역사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우크라이나 역사학의 입장을 이해하려 애썼고, 이 책을 썼습니다. 즉, 지금까지 당연시되어온 서구·일본 학계의 시각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우리는 오랫동안 아무 의심 없이 “키예프 러시아”라고 불러왔지만, 이것은 분명한 오류입니다. 정확한 명칭은 ‘키예프 루시’입니다.
▲일본인에게 있어서의 러시아
일본인에게 러시아는 가장 가까운 ‘유럽의 나라’입니다. 에도 시대(1603–1868) 동안 일본은 장기간 쇄국체제를 유지했습니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일본이 서구에 문호를 연 최초의 나라는 (네덜란드를 제외하면) 미국이라고 생각하지만, 1853~54년 페리 제독의 내항과 거의 같은 시기에 러시아의 푸차친 제독도 나가사키에 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더구나 러시아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일본과의 통상을 요구해왔습니다. 1792년 아담 라크스만이 홋카이도 네무로에 왔습니다. 그는 표류민 다이코쿠야 고다유를 일본에 돌려보내기 위해 파견된 인물로, 고다유는 1782년 이세에서 에도(도쿄)로 향하던 중 폭풍으로 표류해 알류샨 열도에 도착했고, 이후 러시아 본토로 이송되어 1791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여제 예카테리나 2세에게 알현했습니다. 라크스만은 여제가 일본과의 무역을 원하여 보낸 사절이었습니다. 사실 일본인은 더 이전부터 러시아에서 알려져 있었습니다.
1702년에는 오사카 상인 덴베에(伝兵衛)가 표류 끝에 모스크바에 도착해 표트르 1세(대제)에게 알현했습니다. 이후 여러 일본인이 러시아에 표류해 그들을 교사로 삼아 1739년 페테르부르크 일본어학교가 설립되었고, 1750년대에는 일쿠츠크로 이전되어 1810년경까지 운영되었습니다.
이처럼 초기 러시아는 일본에 우호적인 이웃이자 교역 상대국이었습니다. 물론 1804년 레자노프 사절단 시절 불행한 사건(1806~07년 사할린·에토로후 공격)이 있었지만, 1855년 푸차친은 다시 시모다(지금의 시즈오카현)에 입항해 일본 측과 평화적 협상을 거듭하여 일러화친조약(하계조약·시모다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는 미일화친조약의 1년 뒤입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쿠릴열도에서는 우루프섬과 에토로후섬 사이를 국경으로 정하고,
하코다테·시모다·나가사키 3항을 개항했습니다. 하코다테에는 러시아 영사관도 설치되었습니다. 이 초기 단계에서 러시아는 일본인에게 적국이 아니라 문명 전도자였습니다. 특히 근대화를 추진한 표트르 대제는 막부 말기의 일본인들에게 ‘모범 군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1871~73년 이와쿠라 사절단이 유럽 각국을 시찰한 뒤, 러시아가 서유럽보다 귀족과 농민의 격차가 심한 사회임이 드러나 그 매력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1894~95년의 청일전쟁은 일본 역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전쟁 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下関条約)에 대한 삼국간섭(러시아·독일·프랑스)이 일본인의 대(對)러시아 인식을 결정적으로 악화시켰습니다. 이 전쟁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려 했던 일본이 청조에 대해 일으킨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었습니다. 그 결과 체결된 조약에서 일본은 요동반도(遼東半島)를 청국으로부터 할양받았는데, 이에 대해 러시아가 (독일·프랑스와 함께) 강력히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은 러시아를 주요한 적국으로 간주하고, 결국 러일전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어느 쪽이든, 조선에 있어서 이는 참으로 불행한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대립이었습니다. 이후의 일본에게 있어서 러시아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일본인에게 러시아란 단순히 ‘적이냐, 동맹이냐’ 하는 관계적 의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러시아 문학(뿐만 아니라 음악, 우주공학 등 여러 분야 포함)에 대한 강한 관심과 동경(憧憬)입니다. 오늘날 일본인에게는 그다지 피부에 와 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제가 학생이던 시절에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등의 러시아 문학이 매우 인기가 있었습니다.
여러 출판사들이 "세계문학전집”과 같은 기획을 내놓을 때면, 대개 제1권은 톨스토이(《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이반의 바보》 등) 혹은 도스토옙스키(《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백치》 등) 작품으로 채워졌습니다.
▲60년 중세사 학자로서의 성찰
마지막으로, 중세사를 공부해 온 사람으로서 오늘의 시대에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장 현실에 도움이 될 만한 구체적인 말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고대(국가의 기원)가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큰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고대나 중세가 “그저 옛날이야기”라며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한 연구 없이, “우리 민족의 시작은 위대했다”와 같은 근거 없는 주장을 내세우면 자국 내에서만 볼 때는 문제가 작아 보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도 똑같이 자기에게 유리한 역사관을 가지기 때문에, 그들의 시각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따라서 정확한 고대와 중세의 역사상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국가와 그 지도자(대공, 차르, 황제, 공산당 서기장, 대통령)의 권력이 강하고 그에 대항하는 사회적 세력(귀족, 교회, 도시 시민, 지식인)이 약한 러시아의 경우, 이러한 전통은 결코 최근의 현상이 아니라, 적어도 모스크바 대공국 시대부터 이미 뚜렷하게 나타났던 것임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 모스크바 시대부터 이미 강력한 국가와 전제군주에 맞서 자유를 추구한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으며 (예컨대 앞서 언급한 쿠르프스키 공작이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 시도들은 여러 이유로 번번이 좌절되었습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거기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럴 의지가 있다면 말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