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레 임재현 기자
승인
2024.02.29 11:44
의견
0
신경림 시인의 '갈대'의 싯구처럼 온 세상이 몸을 숙인 채 속으로 조용히 흐느끼고 있는 것 같은 요즘이다. 불황이 일상이 돼버린 세상에서 중국발 역병은 서민들을 기어코 나락까지 내몰아 버리려고 작정이라도 한듯이 꺾일 기미가 없다. 남녘땅 영일만 한켠에 자리 잡은 고향에서 들려오는 소식들도 봄바람의 따뜻한 기운과는 거리가 먼 팍팍한 일들 뿐이다.
2년 4개월 전 이 도시의 사람들은 인간의 탐욕이 과학기술을 끌어들여 잉태해낸 돌연변이형 재난에 끔찍한 피해를 당했다. 영일만 일대 내륙의 연약한 지질 특성을 무시하고 강행된 지열발전소 건설과 시험운전이 초래한 규모 5.4, 진도 6~7의 유발지진은 한 도시를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넣은 재앙의 시작이었다. 지진이 자연지진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가공된 사회적 재난이라는 실체가 과학자들에 의해 드러났지만 한번 돌아선 투자기업과 관광객의 발걸음은 불안의 눈길을 쉽게 거두지 않았다. 재난의 도시라는 억울한 오명은 경제적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피해의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불과 1시간 거리의 대구에서 코로나19까지 옮겨오기에 이르렀으니 이 도시는 이중의 재난에 시달리고 있다.
포항지진과 코로나19사태는 모두 재앙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각각 사회적 재난과 자연 재난이라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물론 중국발 여행자의 입국 허용이나 신천지교회의 집단 감염에 조기 대처하지 못한 정부의 책임을 들어 코로나19를 사회적 재난으로 규정하는 시각도 있을 수는 있다. 또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대한민국 정부가 우한의 도시폐쇄 상황에서도 사태의 조기 종식을 낙관케하는 발언을 하고 마스크 조달에 허점을 보인 책임도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외신들이 평가한대로 한국 정부는 시민들의 자율성 보장 등의 측면에서 방역 정책의 적정성을 유연하게 조절했다는 점은 인정하고 싶다. 문재인 대통령의 재난 대응에 대한 이 같은 후한 평가는 포항지진 당시 지역의 수험생과 가족들을 배려한 수능 연기 결정 때 느낀 감사함과 무관하지 않다. 지진 발생 당일 저녁에 내려진 정부의 결단은 갑론을박하는 청와대 수뇌부들에게 던진 대통령의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지진 겪어본 사람 있습니까." 그는 과거 낙향해 있던 경남 양산에서 경주지진의 여파를 직접 경험했다.
문재인 정부에게 이번 코로나 사태는 집권 후반기와 총선까지 맞물리면서 더 살얼음을 걷는 절박한 상황임에 틀림 없다. 4월에 공식 선거전이 시작되면 미래통합당과 보수 진영은 정부의 코로나 대응을 정략적으로 선거 쟁점화할 것이 뻔하다. 울리히 벡의 명저 '위험사회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재난에 시달리는 시민들의 불만과 불안은 특히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에게는 활용도가 높은 득표 수단이다. 문제는 정치인들이 재난을 공동 대응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고 시민과 사회의 총의를 모아내기는 커녕 자신과 정당의 이해관계를 위한 도구로 과도하게 활용하는데 있다. 정치인이 재앙에 대한 책임을 은폐하거나 피해자들의 분노를 자극해 악용함으로써 정치 스스로가 재앙과 다름 없는 해악을 미치는 사례를 직접 경험해본 입장에서 그 심각성을 경고하고 싶다.
포항지진 당시 선출직 정치인들은 지열발전소에 의한 유발지진의 근거들이 하나둘씩 드러나자 시민적 분노가 이듬해 6월의 지방선거로 이어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지진의 원인을 규명하고 전국적 이슈로 확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시민운동은 관 조직과 그물망처럼 얽힌 관변단체, 그리고 지역 유지들의 카르텔에 의한 집요한 방해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 가장 피해가 컸던 흥해읍 인근에서 시민결의대회를 개최하려 했지만 대형교회는 석연찮은 이유로 갑자기 행사장 대관을 불허하기까지 했다. 무려 지진 발생 10개월만에 대규모 군중대회가 열렸지만 주요 선출직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모두 모습을 감췄다. 시민들의 조직화에 주도적으로 나선 양심적 인사들은 뒷돈을 받아서 해외취재를 다녀왔다거나 선거 출마에 뜻이 있다는 지역 황색언론의 음해와 날조 기사에 시달려야 했다.
울리히 벡은 사회가 더 산업화되고 첨단과학기술이 발전할 수록 자본과 정치가 이해관계로 결합함으로써 사회적 재난이 발생할 위험성이 더 크다고 경고했다. 또 지위와 소득이 낮은 계층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재난과 방재의 불평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만큼 정치세력화로 상위 정치에 맞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재난 속에 맞는 총선 상황에서 유권자들이 정부와 정치의 책임을 따지고 표로써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정치 행동이다. 하지만 소중한 한표가 감정적인 정치 선동이나 거짓 정보에 유혹당하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정치가 재난을 대하는 태도가 불순하지 않게 하려면 시민의 유권자 의식이 깨어있어야 한다.
*이 칼럼은 2020년 3월 게재된 <폴리뉴스>와의 협의 아래 전재됐습니다.
저작권자 ⓒ 뉴스포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