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의 일력을 겨우 너댓장 남긴 세밑 여의도 출퇴근길 도로는 평일인데도 벌써 여느날에 비해 한산해 보인다. 이른바 '동여의도'의 하늘로 빌딩들을 경쟁하듯 쏘아올린 증권회사들이 연말을 앞두고 일찌감치 휴가에 들어간 영향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의도역을 비롯해 증권맨들이 빠져나간 이 거리에는 여전히 그들이 누리는 근로여건의 혜택에는 어림도 없는 사무직과 육체 근로자들이 바쁜 발걸음을 하고 있다.
이 한해 동안 출근길 길거리 곳곳에서 마주친 여의도 사람들의 표정과 말씨, 옷매무새를 틈틈이 봐 왔다. 한눈에 봐도 물 찬 제비 같은 모습에서 알 수 있는 증권사 직원에서 부터 후줄근한 입성의 50대 후반 직장인, 사무실 상사에게 오늘 하루 받을 지적을 벌써부터 걱정하는 20대의 앳된 여사원, 출근 후 주방 바닥에서 다듬어야 할 풋것들의 양을 짐작해보는 식당 아주머니들까지. 새벽 2~3시부터 만원버스로 출근한 여의도 빌딩 청소 할머니들은 건물의 온갖 좁은 틈새에 쪼그려앉아 잠시 휴식하는 동안 노동의 댓가에 비해 병원 약값이 더 들어갈 구부정한 뒷모습만 보여줄 뿐이었다.
관찰자였지만 그들과 함께 보낸 한해도 여느 세상살이와 다름이 없었다. 이른 새벽부터 누군가의 노동으로 데워지고, 치워진 사무실에 출근해 오늘 하루를 채울 기사꺼리를 걱정하고, 외근기자의 취재 동선을 짐작하며, 상황에 따라 출입처가 되기도, 광고주가 되기도 하는 기관, 기업들과 신경을 겨루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언론 미디어는 정론직필이라는 숭고한 의무와 함께 기업으로서 생존해야 하는 상반된 가치의 결정체인 시지프스 바위를 굴려 가야 하는 숙명을 지고 있다.
'인터넷 매체 8천여개, 그 가운데 네이버 제휴 매체 800여개'라는 야만적인 한국의 언론 현실에서 편집자가 맞닥뜨려야 할 처지는 이 사회 빈부귀천, 남녀노소의 뭇 장삼이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야 합당하다. 그게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맞다. '인생이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명배우의 말은 모든 노동의 이치에도 들어 맞는다. 꽉찬 전철칸에 실려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노동은 그야말로 비극이다. 하지만 그 댓가로 가족을 건사하고 한해를 보냈다는 연말의 성찰은 뿌듯함에 이르게 한다.
저 80년대 어느 노동자시인의 싯구처럼 청소노동자들은 오늘도 반복되는 고된 노동을 미워하며 자신의 새벽을 밝혔을 것이다. 화이트칼라인 언론노동자에게도 언론의 업무는 자주 미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청소노동자에게 생산의 보람이 어떻게든 주어지듯이 언론의 숙명을 진 압박감은 사회적 책무를 이행하고 있다는 보람으로 보상받는다. 열의에 찬 취재기자들이 회사 경영에 한발을 올려둔 간부기자들에게 보내는 의심과 반발의 눈길도 마찬가지다. 선배기자들이 언론의 사명과 기업의 생존이라는 양극단을 오가는 가운데 자신이 더 나은 기자로 성장할 수 있는 언론 직장은 열려 있다.
어김 없이 각종 사태로 얼룩진 2019년을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다시 홍범도를 생각해본다. 지난 여름과 가을 무렵,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른 뮤지컬 '극장 앞 독립군'을 관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형걸개그림이 내걸린 광화문을 지나온 그날 이후 자주 홍범도를 떠올렸다. 그 도저한 영웅이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의 극장 문지기로 생을 마감했다니. 한 인간이 일신과 주변이 누릴 편안의 유혹을 물리치고 사회적 대의를 선택할 때 과연 어떤 보상이 합당할까를 자주 자문해보았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결국 삶이 마무리되더라도 지사는 후회하지 않을까? 가문 3대가 이미 망했는데 애국지사 서훈의 사회적 예우가 그 간난신고에 합당한 보상일까를 두고두고 생각해왔다.
지금의 가난을 60년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한국사회의 삶은 편안해졌다. 지금 한국의 위기감은 고용과 경제, 그리고 사회 정체성이라는 두 불안함의 축에서 비롯되고 있다. 고용과 경제는 분명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질서의 일상적 위기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크므로 우리의 결정력은 상대적이다. 하지만 사회 정체성의 열쇠는 우리 스스로가 쥐고 있다. 진보와 보수로 양분된 사회는 위험하긴 하나 올바른 가치가 공유되고 공공선으로 지향되고 있다면 정반합의 원리는 작용한다.
2020년 새해는 우리 사회가 자신을 희생한 앞선 이들의 피와 뼈를 밑거름으로 세워졌다는 각성이 드넓게 퍼져 나가기를 바란다. 그래서 홍범도 장군이 우즈베키스탄의 초라한 극장을 박차고 광화문으로, 여의도로 걸어 나와 우뚝 서기를 바란다. 제발 그 울림이 여의도역을 지나는 어느 직장인의 가슴에도 이어지기를 바란다. '총칼만이 침탈이 아니다. 가장을 거리로 내몬 환란(換亂)을 당하고도 텍사스 카우보이의 투기자본에 국부를 털린 침탈을 되풀이하지 않겠다, 다른 나라도 넘보지 않겠다'는 다짐을…'
*이 칼럼은 2019년 12월 게재된 <폴리뉴스>와의 협의 아래 전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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