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고 이순재. (사진= 연극 '리어왕' 공연 포스터 캡쳐)
지난달 막을 내린 '2025 경주 APEC'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본 뜬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로 상징되는 초강대국 미국의 실상을 몇 시간, 아니 몇분 거리의 안방에서 목격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250년 미국사'에 축약된 그 성공의 비결은 흔히 청교도 정신, 개척자 정신을 바탕으로 소수의 엘리트가 자본가의 투자와 특허의 힘을 통해 축적한 부를 '천兆(조) 국가'의 군사력으로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거창한 상위 개념을 제쳐 두고 보는 미국은 유럽 제국에서 물려 받은 패권주의와 강제 납치한 흑인 노예를 비롯해 제3세계 이민자에 대한 착취와 차별의 무덤 위에 세워진 '양키의 나라'라는 오명도 따라 붙는다.
이처럼 엄청난 역사적, 인종적 부채를 주장해야 할 흑인들은 육체 노동으로 미국을 오늘로 이끌어 거대 동력의 한축이 됐을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을 자급해 스스로를 위안하고 이제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미국에 막대한 부를 안기고 있다.
남부 목화농장에서 노예 노동의 질곡에 억눌려 있던 흑인들의 영혼이 압착돼 마치 방울 방울 모인듯 한 '블루스'(blues)와 '소울'(soul)은 마침내 '재즈'(jazz)와 함께 미국을 넘어 전세계적인 음악장르가 됐다. 대공황의 터널을 지나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으로 냉전 체제를 굳히며 일약 최강국에 등극한 1930년~1950년대 미국에는 3명의 여성 재즈 보컬이 탄생했다. '빌리 할리데이'(Billy Holiday), '엘라 피츠제랄드'(Ella Fitzgerald), '사라 본'(Sarah Vaughan)의 재즈는 고강도 저임금의 노동과 가난, 인종 차별에 상처받은 흑인들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위로했다.
특허를 보호받는 발명의 생태계는 미국에 축음기와 라디오, 텔레비전을 통해 노동자들이 유럽처럼 퇴근 후 공연장에 가지 않고도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대중예술의 시대를 열었다. 흑인 뿐만 아니라 백인 노동자들도 하루 하루 이어지는 고단한 노동에서 해방돼 퇴근 후에는 집에 놓인 스피커를 통해 애절한 재즈 선율을 들으며 영혼을 달래고 다음날 하루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를 위로하는 그녀들은 처지는 서로 조금씩 차이가 있었을 뿐 흑인이라는 공통분모에다 여성 차별, 출연료 차별까지 더해져 오히려 더 위로 받아야 할 바닥에 있었다. 특히 '거리의 여인'이었던 어머니처럼 자신도 15살때까지 같은 신세였던 고통이 남편에게 버림 받고 약물 중독으로 이어진 빌리 할리데이는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다.
우리나라도 오늘날 'K-팝', 'K-컬쳐'라는 무대에 오르기까지 그 뒤편에서는 숱한 대중 예술인들의 희생과 고난이 있었다. 특히 80년대 후반에 대학 근처 동숭동의 거리와 술집에서 어깨 너머로 가난한 연극인들의 남루함을 직접 경험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지난주 타계한 배우 이순재 선생의 삶은 문화 예술의 수요자로서, 연극이나 영화 속 현실이 오히려 시시할 정도인 한국에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서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그가 살다가 떠난 한반도는 당대 전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격동의 현장이었다. 한낱 '딴따라'의 자조에 머무를 수도 있었던 그는 이를 낱낱이 겪으며 관객인 백성들이 산업화와 민주화의 현장에서 피땀을 흘렸듯이 대중예술가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세우고 실천했을 것이다.
명예든 뭐든 부족함이 없었을 그가 회고 토크쇼에서 마치 고별사를 하듯이 발췌해 다시 연기한 연극 '리어왕'의 한 대목은 그런 추측에 확신을 준다. '어디선가 이 모진 비바람을 맞고 있을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아/ 머리 눕힐 방 한칸 없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창문처럼 구멍 뚫린 누더기를 걸치고 어찌 험한 비바람을 감당하려 하느냐/ 내가 그동안 너희들에게 너무나 무관심했구나. 너 부자들은 가난한 자의 고통을 몸소 겪어봐라/ 그리하여 넘쳐나는 것들을 그들과 나누고 하늘의 정의를 실천해라.'
연기자 최불암 선생이 지난해 후배들의 요청에 대답한 한마디도 당시 너무 의외라서 가슴에 날아왔는데 앞으로 언젠가 고별사가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배우는 광대다/ 그들은 사회에서 임금이 잘못 하는 것도, 백성이 잘못 하는 것도 풍자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다/ 민족의 사상이 갈라져 서로 싸울 때도, 지금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에 가시덤불이 있을 때도 치우자는 게 '광대 정신'이다. / 임재현(발행인)